F.A.

3 Dots

▪ 일본 도장 기업의 시조새, 사치하타(シヤチハタ株式会社)가 개최하는 도장 디자인 공모전은 전통적인 도장의 가치를 확장하며 새로운 도장의 가치를 탐색한다.

▪ 수상작 중에는 도장으로 가발을 표현한 <가발(Wig)>, 사용자의 감정이 드러나는 <이모 펜(Emo.pen)>,  실수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담은 <미안해 사인(ごめんなサイン)> 등 도장의 틀은 유지하되 개성과 개인의 표현을 더하는 독특한 디자인이 많다.

▪ 최근에는 AR을 활용한 <아날로그 AR 도장(アナログなAR判子)>, 바코드로 메시지를 전하는 <바코드 테이프(BARCODE TAPE)>, 종이가 아닌 공중에 서명하는 <에어 사인(AIR SIGN)> 등 도장에 첨단 기술을 접목하려는 시도 역시 늘고 있다.

 


 

아날로그 왕국인 일본의 사무실 3 대장은 종이, 팩스, 그리고 도장이다. 일본 정부는 비교적 최근인 2020년에서야 공공기관의 서류 디지털화를 선포했다. 그러나 여전히 다수의 회사에서는 기존의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그중 유독 도장에 대한 보수적인 관점이 가장 견고하다. 전자 서명에 반대하며 도장 문화를 지키려는 국회의원 연맹, 도장의련까지 존재할 정도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도장을 찍어야만 서류의 가치와 품격이 유지된다는 믿음이 지금도 존재한다. 젊은 세대로 넘어오며 그런 보수적인 생각이 많이 옅어지긴 했지만 기성세대에게는 여전히 유효하다.

 

일본의 오래된 도장 문화가 이 정도로 견고하게 유지되는 이유는 일본인에게 도장은 그 자체로 한 사람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도장은 사회적 관계에서의 또 다른 나 자신으로, 상징과 표식 이상의 인격을 지니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결재란에 도장을 찍을 때 직급이 높은 사람에게 낮은 사람이 더 깊이 고개를 숙이듯 비스듬히 찍는 도장 예절이 있을 정도다. 이런 겸양 도장 문화는 얼핏 들으면 과하게 보수적인 도장의 인격화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인에게 도장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최근 전자 결재 방식으로의 전환이 더욱더 빨라지며 일본의 도장 문화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하지만 아날로그의 나라답게 꼭 전자서명이 아니더라도 도장을 활용할 수 있는 방식에 변화구를 던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 쟁점은 지나치게 보수적인 부분은 덜어 놓되 가치와 재미를 더하는 도장 디자인을 개발한다는 것이다. 이전의 도장 문화는 사회적으로 규격에 따라 굉장히 딱딱한 형태였다면 새로운 도장 문화는 그 표식이 주는 가치를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확장해 보는 즐거움을 준다.

 

그 변화의 중심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도장 전문 기업이 있다는 점 역시 특별하게 다가온다. 일본 도장계의 시조새라고 불리는 사치하타(シヤチハタ株式会社)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사치하타는 2025년, 창업 100주년을 맞은 오래된 기업이다. 일본에서는 사회 초년생에게 바로 이 사치하타 도장을 선물해 주는 것이 관례처럼 여겨졌다. 여전히 사치하타는 도장 제작을 중심으로 하지만 전자 결재 분야에서도 빠르게 대응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가는 중이다. 그러나 표식의 가치를 이어간다는 회사의 모토에 따라 도장 디자인 공모전을 열어 새로운 도장의 가치를 스스로 탐색해 나가기도 한다. 2018년 10년 만에 다시 개최된 제11회 공모전부터 현재까지 이러한 가치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다채로운 디자인을 만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사치하타 공모전의 주요 수상작들을 살펴보며 일본의 도장 문화가 추구하는 미래의 표식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새롭게 진화하고 있는 일본의 QR코드 인감 ©Shachihata
일본의 겸양 도장 문화 ©네이버블로그

내 마음이 들리나요? 개성과 감성을 더한 도장

사치하타 공모전 수상작 중에는 전통적인 도장의 틀은 유지하되 개성과 개인의 표현을 더하는 독특한 디자인이 많다. 디자인 스튜디오 부이욘(design studio Bouillon)의 <가발(Wig)>은 이름 그대로 도장의 가발을 디자인한 작품이다. 도장 자체에 인격을 투사하는 일본 도장 문화의 특징을 살려 마치 도장이 누군가의 얼굴이자 아이콘처럼 보이는 디자인을 생각해 낸 것이다. 도장 가발은 평범했던 도장에 인상을 만들어내고, 도장은 하나의 생동감 넘치는 인격체가 된다. 도장을 찍는 행위에 대한 즐거움도 당연히 같이 올라간다. 일본 도장 문화에 깔린 보수적인 기존의 문화를 오히려 유쾌하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디자인이다.

 

도장에 인격을 부여하고 개성을 더하는 또 다른 작품으로는 카즈키 오코시(Kazuki Ohkoshi)의 <이모 펜(Emo.pen)>이 있다. 전업 디자이너가 아닌 회사원인 카즈키 오코시는 여전히 아날로그 도장을 쓰는 자신의 니즈를 반영한 디자인을 완성했다. 이모 펜은 얼굴 윤곽 도장과 네임펜을 함께 사용하는 방식으로, 그날 자신의 기분과 상황을 상대에게 전할 수 있다. 감정이 살아 움직이는 얼굴이 된 도장 덕에 필요에 따라 짧은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다. 중요한 자리에서 사용하기는 어렵지만 여전히 많은 서류를 종이로 처리하는 일본이기에 하나의 옵션이 될 수 있다. 이모 펜은 도장을 소통 창구로 이용할 수 있는 창의적인 디자인이다.

<가발(Wig)> ©Shachihata
<이모 펜(Emo.pen)> ©Shachihata

도장에 감정을 담은 또 하나의 디자인은 아츠로 미야코(Atsuro Miyako)와 소 오타(So Ohta)의 <미안해 사인(ごめんなサイン)>이다. 이 도장은 종이 서류에서 정정한 부분을 표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실제로 직장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이모티콘에서 착안한 디자인은 미안한 마음을 재치와 유머로 표현한다. 상사 쪽으로 기울여 찍는 겸양 도장이 권력관계에 중점을 둔 소통 방법이었다면, <미안해 사인>은 훨씬 더 수평적인 분위기의 회사 문화에서 조금 더 자유로운 소통을 돕는다. 여전히 종이로 된 서류를 많이 처리하는 일본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즐겁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인성(印星)> 역시 다양한 표현을 위한 도장 디자인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인성>은 별 모양처럼 튀어나온 부분마다 다른 도장이 배치되어 있다. 하나가 여섯 개의 도장 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로 여러 개의 도장을 챙길 필요가 없고 중요한 자리를 위한 필수적인 도장과 평소 가볍게 쓰는 도장을 언제든 자유롭게 섞어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실용성과 심미성 모두를 겸비한 디자인으로 도장에 개인의 개성과 다양한 표현 방식을 담아냈다.

<미안해 사인(ごめんなサイン)> ©Shachihata
<인성(印星)> ©Shachihata

첨단기술과 함께한 재미난 표현 방식

여전히 기존 인감을 사용하는 문화에 새로운 기술을 접목한 시도도 있다. 히로시 이와타(Hiroshi Iwata)가 선보인 <아날로그 AR 도장(アナログなAR判子)>은 일본 전통 도장에 AR(증강현실) 기술을 접목한 작품이다. 인감이 AR 코드가 되고 스마트폰으로 도장을 찍으면 개인정보를 증강현실로 확인할 수 있다. 전통적인 도장을 여전히 사용하는 곳이 많은 일본의 현실을 반영하되 도장에서 확인할 수 없는 추가적인 정보를 더해 개인의 개성을 표현하고 알릴 기회를 만들었다.

 

비슷한 작품으로는 디자인팀 JSD의 <바코드 테이프(BARCODE TAPE)>가 있다. 일반적인 도장이 아닌 바코드 형태지만 필요한 부분에 붙여 식별 정보를 남긴다는 점에서 도장의 역할과 유사하다. 테이프처럼 되어 있어 뜯어 쓸 수 있다는 점도 독특하다. 바코드를 찍으면 담긴 메시지를 같이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일반적인 도장과의 차별성을 더한다. 상업적으로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유용성에 높은 점수를 받아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고 한다.

<아날로그 AR 도장(アナログなAR判子)> ©Shachihata
<바코드 테이프(BARCODE TAPE)> ©Shachihata

전자 결재 방식이 늘어나는 추세에 맞추어 선보인 작품도 있다. 츠요시 히메노(Tsuyoshi Himeno)의 <마이 페이스 스탬프(My Face Stamp)>는 자기 얼굴을 전자 도장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디자인이다. 프로필 사진 역할뿐 아니라 때에 따라 감정과 표정도 담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도장에 인격을 부여하는 전통적인 도장 문화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디지털로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매력도를 높였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아예 종이가 아닌 기술을 활용해 공중에 서명을 남기는 방식의 디자인도 소개되었다. 요시키 아오야기(Yoshiki Aoyagi)의 <에어 사인(AIR SIGN)>은 일종의 3차원 서명이다. 장치는 사인의 궤도, 좌표, 스트로크 속도를 읽어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개인의 고유한 3D 서명을 만들어낸다. 이 기술은 아직까지는 빠르게 상용화되기 어렵지만 미래의 도장과 그 표식의 가치를 계속 탐구해 나가는 진취적인 디자인으로 선정되었다. 

<마이 페이스 스탬프(My Face Stamp)> ©Shachihata
<에어 사인(AIR SIGN)> ©Shachihata

도장을 넘어서는 표식의 매력

기존의 도장 사용 방식을 넘어 표식의 다양한 가치에 집중한 새로운 형식의 수상작도 돋보인다. 히로키 나카야마(Hiroki Nakayama)의 <F!nd!t>은 자전거에 달 수 있는 벨 모양의 스탬프이다.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 느낌표가 붙어있는 스탬프를 누르면 연동된 지도 앱에 그곳이 표시된다. 물리적으로 도장을 눌러 찍는 행위에서 착안했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 나만의 온라인 지도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재미를 선사한다.

 

요리를 완성한 뒤 접시에 찍는 <요리 낙관(料理のための落款印)>도 예상을 뒤엎는 도장 디자인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디자인 팀 벤치(bench)는 식용 색소를 사용한 잉크로 접시에 찍을 수 있는 도장 디자인을 만들었다. 요리 낙관은 요리 사진을 SNS에 올릴 때도 좋고 파인다이닝에서 활용하기에도 좋다. 기존 도장의 의미는 이어가지만 종이가 아닌 접시에 찍는 방식으로 사고를 전환했다는 점이 신선한 차별 지점을 만든다. 

<F!nd!t> ©Shachihata
<요리 낙관(料理のための落款印)> ©Shachihata

도장을 벗어나 인장이 가진 표식의 의미를 확장한 디자인도 있다. 카즈야 이시카와(Kazuya Ishikawa)의 <이름 패턴 디자인(名前柄模様)>은 도장에 들어가는 개인의 인장을 패턴 무늬처럼 이용해 다양한 디자인 제품에 이용할 수 있도록 구상되었다. 고급스러운 선물에 맞춤으로 사용할 수 있고, 개인의 상징을 더욱더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확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용성 부문에서 큰 점수를 받아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표식의 역할을 파티용품으로까지 확대한 사례도 있다. 치히로 에노모토(Chihiro Enomoto)의 <축하해! (めでたいん!)>는 파티에 터트려 사용하는 폭죽에 인장을 담은 디자인을 선보였다. 콘페티에 축하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새기는 것이다. 서류에만 인장을 이용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인생에서 축하할 사건에 개인의 중요한 표식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도장의 가치를 확장한 작품으로 2024년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다.

<이름 패턴 디자인(名前柄模様)> ©Shachihata
<축하해! (めでたいん!)> ©Shachihata

사치하타 도장 공모전의 수상작들은 점점 더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전통적인 틀 안에서 우리가 도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까지 상상력을 더한 작품들이 매년 소개되고 있다. 특히 이 공모전은 가장 보수적일 수 있는 문화의 틀 안에서 새로운 재미와 가치를 발견해 나간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 크다.

 

사회의 보편적인 개념을 제한이나 장애물로 생각하는 대신, 오히려 재밌게 확장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통로로 여기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도장 디자인은 나에 대한 표현에서 확장된 표식의 가치를 살리는 디자인으로 계속 진화해 나가고 있다. 더불어 도장 문화 역시 한 개인의 상징물에서 급변하는 시대 변화의 상징물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